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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백사白沙 이항복과李恒福 스승 & 촉나라 정치가 제갈량

by Estilo Verdee 2022.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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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 궁전

조선 중기 때 명재상이었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오성대대감이라 불린다. 그 까닭은 임진왜란 때 왕비와 왕자를 안전하게 모시고, 선조를 의주까지 잘 모신 공을 인정받아 오성부원군에 봉해졌기에 따른 것이다. 그는 권율 장군의 사위가 되어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이러한 이항복은 스승 받들이기를 하늘과 같이 모신 걸로 유명하다.

 

"대감마님, 대감마님의 스승님께서 오셨습니다."

"스승님께서 오셨다고?"

어느 날 스승이 왔다는 하인의 말에 방에 있던 이항복은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좌중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 (한 사람의 아래, 만 사람의 위) 영의정인 그가 보여준 행동은 그러고도 남았다.

"스승님, 오셨습니까?"

이항복은 이렇게 말하며 초라한 행색의 노인을 모시고, 방으로 들어와서는 큰절을 올렸다.

"스승님 , 잘 오셨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했는데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나는 잘 지냈소이다."

그의 스승은 말을 올려 말했다. 이항복은 말씀을 놓으라며 깍듯이 말했다.

"스승님, 계시는 동안 편히 지내십시오."

 

이항복은 어린 시절 가르침을 주었던 스승을 극진히 모시고, 그가 갈 때 면포 십여단과 쌀 두 섬을 노자로 주었다. 그러자 스승은 나라의 재산을 이렇게 많이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항복은 자신의 것에서 드리는 것이니 받아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스승은 쌀 두 말만 갖고 가겠다고 했다. 이에 이항복은 스승님이 그러시면 제가 너무 송구하다고 말했고, '어찌 스승이라고 하면서 말을 따르지 않는가'하고 말했다. 그러자 이항복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스승의 말에 따랐다고 한다. 그의 스승은 청빈하고 강직했는데, 제자인 그 또한 청빈하고 강직하여 명재상으로 이름을 드높였다.

 

 

*李恒福 1556-1618

(조선 중기 때 문신, 우승지, 예문관 대제학, 병조판서, 영의정, 주요 저서 <사례훈몽>, <주소계의> 외 다수)

 

 

출처 《1일 1페이지 짧고 깊은 지식수업 365 책中》 -저자, 김옥림 님

 

 

중국 현대의상 및 건축물

 

제갈량

181년 낭야군의 지방관이었던 제갈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공명이며 별호는 와룡이다. 15세가 되기 전에 부모를 여의어 한동안 백부 제갈현의 보살핌을 받았다. 백부가 죽자 그는 형주로 옮겨갔다. 그는 양양의 융중이란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학문을 연마했다. 당시 형주에는 전란을 피해온 명망 높은 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그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그는 양양지역의 유명한 문인이며 대부호였던 황승언의 사위로, 20대 중반의 나이에 이미 재야의 현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소식을 듣고 찾아간 유비에 의해 책사로서 정치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한마디로 그는 평한다면 엄정함의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하지만 그는 부드러울 땐 부드럽게 대처할 줄도 아는 융통성도 지니고 있다. 엄정하기만 하면 사람들로부터 외면받기 십상이다. 이를 잘 아는 그는 자신이 엄정함만을 추구하는 원칙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철저한 신상필벌信償必罰(믿음과 신뢰를 준 사람에겐 그에 대한 보상을 죄를 지은자에겐 반드시 그에 합당한 벌을 준다는 뜻) 주의자였다.이런 그의 인품이 잘 드러나는 이야기이다.

 

위나라와의 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선봉장은 젊은 장수 마속이 맡았다. 그는 마속을 장래가 촉망되는 장수로 총애했다. 그러나 마속은 그가 세운 전략을 무시한 채 자기 멋대로 전술을 펴는 바람에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는 너무도 아끼는 참모였지만, 일벌백계하는 뜻으로 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속의 목이 말아갔다. 그는 공명정대한 군율을 위해 마속의 목을 베고야 말았다. 그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라도 잘못을 하면, 엄한 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널리 알림으로써, 실수를 줄이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심어주었다. 장졸들은 제갈량의 엄정함에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을 다했다. 그 결과 촉나라는 더욱 강성해졌다. 그의 이런 엄정함의 이면엔 융통성이 있다. 그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잘못을 뉘우치면 기회를 주었으며, 아무리 적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를 자신의 곁에 두었다. 그는 공과 사를 엄격히 하고 뛰어난 전략을 펼친 최고의 지략가이다.

 

 

* 181-234

(촉나라 정치가, 유비의 책사, 당대 최고의 지략가)

 

 

출처 《1일 1페이지 짧고 깊은 지식수업 365 책中》 -저자, 김옥림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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